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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인사이트 시리즈

대한민국 좌우갈등 (상): 좌파와 우파, 모든 비극의 시작

by routine-note 2025. 8.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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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이념 갈등 (상)
모든 비극의 시작

"대한민국이라는 집은 어째서 처음부터 두 개의 방으로 나뉘어 지어졌는가. 그리고 그 방 사이의 벽은 왜 이토록 높고 단단해졌는가."

서론: '좌'와 '우'라는 이름의 유령

정치적 이념을 설명하는 가장 보편적인 틀인 '좌파(left)'와 '우파(right)'라는 용어는 1789년 프랑스 혁명 당시 국민의회 의장석을 기준으로 왼편에는 급진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공화파가, 오른편에는 왕정과 기존 질서의 유지를 지지하는 왕당파가 앉았던 좌석 배치에서 유래했다. 이후 좌파는 평등, 분배, 개혁을, 우파는 자유, 성장, 안정을 핵심 가치로 삼으며 각국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발전해왔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좌파'와 '우파'라는 개념은 서구의 원형과는 전혀 다른, 매우 특수하고 비극적인 의미로 변질되었다. 한국의 좌우 대립은 본질적으로 경제 정책이나 사회 개혁의 방향성을 둘러싼 건전한 정책 경쟁이 아니었다. 그 심장부에는 **민족의 분단**이라는 냉엄한 현실과 **한국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이 자리하고 있으며, 이는 정치적 대립을 국가의 존립과 정체성을 둘러싼 생존 투쟁으로 변모시켰다. 한국에서 '좌파'는 종종 북한에 동조하거나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세력, 즉 '종북' 또는 '빨갱이'로 낙인찍혔고, '우파'는 반공과 한미동맹을 국시(國是)로 삼는 체제 수호 세력으로 규정되었다.

이러한 살벌한 이분법적 구도는 정치적 견해가 다른 상대를 정책적 경쟁자로 보지 않고, 국가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내부의 적'**으로 간주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타협과 협상은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지고, 정치는 상대를 절멸시켜야 하는 '전쟁'이 되었다. 이 글은 바로 이 비극의 역사적 궤적을 따라가며, 오늘날 한국 사회를 옭아매고 있는 이념 갈등의 뿌리가 어떻게 생겨나고 자라났는지 그 기원을 심층 추적하고자 한다.

제1부: 분열의 씨앗 (1910-1945)

1-1. 독립을 향한 다른 길, 두 개의 꿈

대한민국의 좌우 갈등은 냉전의 산물이기 이전에, 일제강점기라는 특수한 역사적 조건 속에서 잉태되었다. 독립이라는 단일한 목표 아래에서도, 해방된 조국을 어떤 모습으로 건설할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철학의 차이가 존재했다. 이는 크게 민족주의 노선과 사회주의 노선으로 분화되었으며, 이 두 흐름의 경쟁과 갈등, 그리고 실패한 통합의 경험은 해방 이후 본격화될 이념 대립의 원형을 제공했다.

민족주의 노선은 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안창호, 이승만, 김구 등 지도자들은 서구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독립된 조국의 이상적인 모델로 삼았다. 그들은 당장의 무장 투쟁보다는 교육 진흥과 산업 육성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키우거나(실력양성론), 미국 등 서구 열강과의 외교를 통해 독립을 인정받으려는(외교독립론) 등 점진적이고 외교적인 해법에 무게를 두었다. 그들의 꿈은 일제로부터의 해방을 넘어, 근대적인 민주공화국을 건설하는 데 있었다.

반면, 사회주의 노선은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성공과 레닌의 '민족자결주의' 표방에 큰 영향을 받았다. 특히 젊은 지식인과 활동가들은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를 동일시하며, 일본 제국주의로부터의 '민족 해방'과 지주·자본가 계급으로부터의 '계급 해방'을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들에게 자본주의 국가는 또 다른 형태의 억압 체제에 불과했으며, 진정한 해방은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통해 모든 억압과 착취가 사라진 공산사회 건설에 있었다. 이러한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사상은 식민지 지식인들에게 강력한 대안으로 받아들여졌고, 1925년 조선공산당 창당을 비롯해 수많은 사회주의 단체들이 결성되어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을 주도했다.

1-2. 짧은 동행, 비극적 이별 - 신간회(新幹會)의 교훈

서로 다른 길을 걷던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세력이 단일한 적,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기 위해 손을 잡은 가장 중요한 시도가 바로 1927년 결성된 **신간회(新幹會)**였다.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한다"는 강령 아래, 일제와 타협하지 않는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연합하여 탄생한 신간회는 전국 140여 개 지회에 4만 명에 달하는 회원을 거느린 거대 조직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이 위태롭고 찬란했던 합작의 실험은 4년 만인 1931년 '해소'라는 이름으로 막을 내렸다. 실패의 원인은 복합적이었다. 내부적으로는 지도부 내 이념 갈등과 주도권 다툼이 심화되었고, 결정적인 외부 요인은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지도부인 **코민테른의 노선 변경**이었다. 코민테른이 기존의 민족주의 세력과의 협력 노선을 폐기하고 계급투쟁을 전면에 내세우는 급진 노선으로 전환할 것을 지시하자, 신간회 내 사회주의 세력은 민족주의자들과의 결별을 선언하고 해소론을 주도하게 되었다.

신간회의 실패는 해방 이후 전개될 역사를 암울하게 예고하는 사건이었다. 공동의 적 앞에서도 끝내 극복하지 못한 이념과 노선의 차이, 그리고 외부 세력의 지침에 따라 연대가 손쉽게 파괴될 수 있다는 사실은 해방 이후 외세의 개입 속에서 좌우 갈등이 얼마나 파국적으로 치달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비극적 전조였다.

제2부: 대립의 고착화 (1945-1953)

2-1. 신탁통치 논쟁, '애국'과 '매국'의 프레임 전쟁

1945년 8월 15일, 예기치 않게 찾아온 해방은 기쁨과 동시에 극심한 혼란의 시작이었다. 식민지 시기부터 존재했던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노선의 갈등은 미·소 양대 강국의 군사적 점령과 냉전이라는 새로운 국제 질서 속에서 폭발적으로 증폭되었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결정 소식이 국내에 전해지는 과정에서 치명적인 왜곡 보도가 나오면서 해방 정국은 돌이킬 수 없는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이라는 동아일보의 오보는 실제 회의 내용과 정반대였지만, 해방 정국의 모든 논의를 단숨에 **친미/반소 프레임**으로 몰아넣었다. 김구, 이승만 등 우익 지도자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즉각 대대적인 반탁 운동에 나섰다. 그들은 신탁통치를 제2의 식민지배로 규정하고, **반탁을 '애국', 신탁통치안 전체를 지지하는 것을 '매국'**으로 모는 강력한 이분법적 프레임을 구축했다.

처음에 반탁 입장이었던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등 좌익 진영은 며칠 뒤 협정 전문을 확인하고는, 통일 임시정부 수립이라는 대의를 위해 협정안 전체를 지지하는 '찬탁'으로 선회했다. 그러나 이 전략적 선택은 우익이 쳐놓은 '애국 대 매국'의 덫에 완벽하게 걸려드는 결과를 낳았다. 좌익의 '찬탁'은 곧 '소련의 주장을 따르는 매국 행위'로 낙인찍혔고, 대중적 지지를 급격히 상실했다. 결국 신탁통치 논쟁은 통일 국가 수립의 가능성을 파괴하고, 이후 70년 넘게 한국 정치를 지배하게 될 치명적인 대립 구도를 만들어낸 결정적 사건이었다.

2-2. 피로 새긴 분단선 - 제주 4·3과 여순 10·19

신탁통치 논쟁으로 조성된 극단적인 이념 대립은 곧 물리적 폭력과 학살로 이어졌다. 특히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강행하려는 이승만 정권과 미군정에 맞선 저항은 **'빨갱이 소탕'**이라는 명분 아래 무자비하게 진압되었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제주 4·3사건과 여수·순천 10·19사건은 국가 권력이 이념이 다른 국민을 어떻게 적으로 규정하고 제거했는지를 보여주는 참혹한 증거이며, 이념의 골을 피로써 깊게 파낸 비극이었다.

제주 4·3사건 (1947-1954)은 1948년 5·10 단독선거를 반대하며 남조선로동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봉기하자, 이승만 정부와 미군정이 이를 '공산 폭동'으로 규정하고 대대적인 토벌 작전을 개시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해안선 5km 이상 중산간 지대 출입자는 이유 불문하고 총살'이라는 초토화 작전이 벌어졌고, 군경 토벌대는 마을을 불태우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주민들을 집단 학살했다. 정부 공식 보고서에 따르면 확인된 희생자만 1만 4천여 명에 달하며, 전체 희생자는 2만 5천에서 3만 명으로 추정된다.

여수·순천 10·19사건 (1948)은 제주 4·3의 비극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하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 군인들이 '제주도민 학살'에 동참할 수 없다며 제주 출동 명령을 거부하고 봉기한 사건이다. 진압 과정에서 진압군은 반란군에 협력했다는 '부역자'를 색출한다는 명분으로 수천 명의 민간인을 학살했으며, 이승만 정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반정부 활동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한 **국가보안법**을 제정했다.

- 하편에서 계속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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