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중 기술 패권 전쟁 (4부)
바이든 행정부의 '디리스킹'과 제도화된 기술 전쟁
제4부: 돌아올 수 없는 강: 바이든 행정부의 '디리스킹'과 제도화된 기술 전쟁
도널드 트럼프의 퇴장과 조 바이든 행정부의 등장은 미중 관계의 양상에 표면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거칠고 일방적이던 언사는 신중하고 다자적인 외교적 수사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톤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기술 패권을 둘러싼 전쟁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바이든 행정부는 트럼프 시대에 시작된 대결 구도를 더욱 심화, 확대하고, 동맹과 제도를 통해 체계화했다. 이제 기술 전쟁은 특정 대통령의 정책적 선택이 아닌, 미국의 초당적 지지를 받는 대전략의 핵심축으로 자리 잡았다.
4.1. 동맹과 함께 중국 포위하기: 반도체법과 칩4 동맹
바이든 행정부의 대중국 전략은 트럼프의 일방주의에서 동맹을 활용하는 다자주의로 전환되었다. 그 중심에는 2022년 제정된 '반도체와 과학법(CHIPS and Science Act)'이 있다. 이 법은 미국 내 반도체 제조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520억 달러 이상의 막대한 보조금을 지원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하지만 이 법의 핵심은 '가드레일(guardrail)' 조항에 있다. 이 조항은 미국의 보조금을 받는 기업이 향후 10년간 중국과 같은 '우려 국가'에서 첨단 반도체 생산 능력을 실질적으로 확장하는 것을 금지한다.
이는 미국 내 생산시설을 유치하는 동시에, 동맹국 기업들이 중국에 첨단 기술 투자를 하지 못하도록 묶어두는 이중의 족쇄다. 이와 함께 추진되는 것이 '칩4(Chip 4)' 또는 '팹4(Fab 4)'로 불리는 반도체 동맹 구상이다. 이는 반도체 공급망의 핵심 고리를 쥐고 있는 미국(설계, 장비), 일본(소재, 장비), 대만(파운드리), 그리고 한국(메모리, 파운드리)이 정책을 조율하여 중국을 배제하는 기술 동맹을 구축하려는 시도다.
이러한 접근은 트럼프의 무차별적인 관세보다 훨씬 더 전략적이고 정교하다. 첫째, 팬데믹을 통해 드러난 공급망의 취약성을 해결하기 위해 핵심 제조업을 미국으로 다시 가져오고(reshoring), 둘째, 가치를 공유하는 동맹국들끼리 공급망을 재편하여(friend-shoring) 중국이 접근할 수 없는 미국 주도의 새로운 기술 생태계를 구축하려는 것이다. 이는 사실상 반도체 기술을 매개로 중국을 포위하는 거대한 전략이다.
4.2. '디커플링'에서 '디리스킹'으로: 본질은 같은 기술 봉쇄
바이든 행정부는 '디커플링(탈동조화)'이라는 공격적인 용어 대신 '디리스킹(위험 제거)'이라는 신중한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재닛 옐런 재무장관 등 고위 관료들은 미국이 중국과의 완전한 경제적 단절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핵심 공급망을 안정시키고 중국이 미국의 첨단 기술을 이용해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것을 막는 '위험 관리'를 목표로 한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용어의 변화가 정책의 본질을 바꾸지는 않았다. 오히려 미국의 기술 통제는 더욱 정밀하고 강력해졌다. 바이든 행정부는 첨단 AI 칩과 반도체 제조 장비에 대한 수출 통제를 더욱 확대했으며, 심지어 특정 사양의 AI 칩이 탑재된 노트북 컴퓨터의 수출까지 제한하는 등 규제의 그물망을 촘촘히 하고 있다.
'디리스킹'은 동맹국과 기업들의 반발을 최소화하면서도 중국의 급소를 정확히 타격하려는 전략적 수사다. 이는 '작은 마당에 높은 울타리(small yard, high fence)' 전략으로 요약될 수 있는데, 경제 전반이 아닌 AI, 양자컴퓨팅, 바이오 등 미래 군사력과 경제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소수의 핵심 기술 분야에 한정해 높은 장벽을 치는 방식이다. 즉, '디리스킹'은 전면전의 혼란을 피하면서도 중국의 기술 발전을 가장 결정적인 지점에서 억제하려는, 보다 지속가능하고 외교적으로 세련된 형태의 기술 봉쇄 전략인 셈이다.
4.3. 고래 싸움에 낀 새우: 한국 반도체 산업의 딜레마
제도화된 미중 기술 전쟁은 대한민국에게 실존적인 딜레마를 안겨주고 있다. 중국은 한국의 최대 교역 상대국이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대표 반도체 기업들의 핵심 생산기지가 위치한 곳이다. 반면 미국은 한국의 유일한 군사 동맹국이자 반도체 원천 기술과 장비를 공급하는 핵심 파트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의 대중국 제재는 한국 기업들에게 거대한 지뢰밭을 형성하고 있다.
- 중국 내 생산 차질: 반도체법의 가드레일 조항은 삼성과 SK하이닉스가 중국 시안과 우시에 위치한 대규모 공장을 미래 기술에 맞춰 업그레이드하거나 증설하는 데 심각한 제약을 가한다.
- 중국 시장 매출 감소: 화웨이와 같은 중국 기업에 대한 미국의 제재는 이미 한국 기업들에게 수조 원대의 매출 손실을 안겨주었다.
- 강제된 미국 투자: 미국 내 공장 건설 압박은 높은 건설 및 운영 비용, 숙련된 인력 확보의 어려움 등 막대한 부담으로 작용한다.
- 중국의 보복 위험: 한국 기업이 미국의 제재에 동참할 경우, 중국 정부는 비공식적인 압박('위에탄'), 반독점 조사, 불매 운동 등 다양한 방식으로 보복에 나설 수 있다.
- 중국 경쟁사의 추격 가속화: 미국의 압박은 역설적으로 중국이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 반도체 국산화에 나서도록 부추기고 있다. 특히 한국의 주력 분야인 메모리 반도체에서 중국의 기술 추격이 빨라지는 것은 장기적으로 가장 큰 위협이다.
결론적으로 한국에게 미중 기술 전쟁은 더 이상 강 건너 불이 아니다. 국가 경제의 명운이 걸린 반도체 산업의 생존이 걸린 문제다. 안보 동맹(미국)과 경제 파트너(중국) 사이에서 자국의 기술 주권과 경제적 이익을 지키기 위한 위태로운 줄타기를 강요받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미중 관계의 구조적 변화는 고전적인 '안보 딜레마'의 양상을 띤다. 과거의 굴욕감에서 벗어나기 위한 중국의 기술 자립 노력은 미국에게 자국 주도의 세계 질서를 뒤엎으려는 공격적인 행동으로 비친다. 이에 대한 미국의 방어적 조치(수출 통제, 동맹 규합)는 중국에게 자국의 발전을 억압하려는 공격적인 봉쇄로 인식되며, 이는 1990년대의 악몽을 재확인시켜준다. 이러한 인식은 중국으로 하여금 자력갱생에 더욱 매달리게 만들고, SMIC의 7나노 칩과 같은 기술적 돌파를 이끌어낸다. 그러면 워싱턴에서는 다시 기존의 통제가 불충분하다는 주장이 힘을 얻어 더 강력한 제재로 이어지는 '행동-반응'의 악순환이 반복된다. 이 역학 관계는 이제 특정 지도자나 정당의 의지를 넘어, 양국 관계를 규정하는 구조적 현실이 되었으며, 탈출구를 찾기 매우 어려운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정책 분야 | 트럼프 행정부 (2017-2021) | 바이든 행정부 (2021-현재) | 전략적 목표 및 영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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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적 접근법 | 일방주의, 예측 불가능성, '미국 우선주의' | 다자주의, 동맹 규합, '미국의 리더십 회복' | 바이든 행정부가 동맹을 활용해 제재의 정당성과 효과를 높이는, 보다 지속가능한 전략으로 전환 |
핵심 정책 도구 | 고율 관세, 개별 기업(화웨이 등) 제재 | 반도체 보조금(CHIPS법), 정밀 수출통제, 투자 제한 | 무차별적 관세에서 벗어나, 반도체 등 핵심 기술 공급망 자체를 통제하는 방식으로 정교화 |
핵심 명분 | 대중 무역적자, 불공정 무역 관행 | 국가안보, 공급망 회복력, 민주주의 vs. 권위주의 | 갈등의 명분을 경제 논리에서 안보 및 가치 동맹의 논리로 격상시켜 동맹국의 참여를 유도 |
주요 정책/법안 | 통상법 301조 조사, 화웨이 Entity List 등재 | 반도체와 과학법(CHIPS Act), 첨단 AI칩 수출통제 확대, 칩4 동맹 구상 | 기술 전쟁을 제도화하고, 보조금과 규제를 결합하여 중국의 기술 발전을 원천적으로 차단 시도 |
결론: 끝나지 않은 전쟁, 새로운 질서의 모색
미중 기술 패권 전쟁은 1990년대 미국이 가한 압박이 중국에 남긴 '굴욕의 기억'에서 시작되었다. 이 기억은 중국으로 하여금 수십 년간 '칼을 갈게' 만들었고, '중국제조 2025'라는 야심 찬 청사진으로 구체화되었다. 중국의 노골적인 기술 굴기 선언은 미국 내 '관여 정책'의 종말을 고했고, 트럼프 행정부의 등장은 잠재된 갈등을 전면적인 '무역 전쟁'과 '기술 전쟁'으로 폭발시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그리고 바이든 행정부는 이 전쟁을 동맹과 제도를 통해 더욱 정교하고 체계적인 '구조적 경쟁'으로 제도화했다.
결론적으로, 현재의 미중 기술 전쟁은 단순히 시장 점유율이나 특정 기술의 우위를 다투는 경쟁을 넘어섰다. 이는 21세기 글로벌 질서를 지배할 규칙과 규범, 그리고 리더십을 둘러싼 근본적인 투쟁이다. 이 전쟁의 결과는 미래 세계가 미국 주도의 단일한 기술 생태계로 유지될 것인지, 혹은 미국과 중국이 주도하는 양립 불가능한 두 개의 기술 블록으로 분열될 것인지를 결정할 것이다.
이러한 거대한 지정학적 단층선 위에서 대한민국과 같은 중견국은 전례 없는 도전에 직면해 있다. 안보 동맹과 경제 파트너 사이에서 어느 한쪽을 선택하기 어려운 '새우'의 딜레마는 이제 상수(常數)가 되었다. 이 험난한 시대를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단순히 외부 환경 변화에 반응하는 위기 관리를 넘어, 국가의 명운을 건 능동적인 대전략이 요구된다. 핵심은 독자적인 기술 주권을 확보하여 누구도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전략적 자산을 구축하는 것이다. 동시에 경제 파트너십을 다변화하여 특정 국가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한국의 독자적인 목소리와 국익을 관철할 수 있는 외교적 공간을 창출해야 한다.
미중 기술 전쟁은 끝나지 않았으며, 새로운 질서는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 불확실성의 시대에, 한국은 스스로의 힘을 길러 다가올 새로운 질서의 규칙 제정 과정에 참여하는 '룰 메이커(rule-maker)'가 될 것인지, 아니면 강대국들이 정한 규칙에 순응하는 '룰 테이커(rule-taker)'로 남을 것인지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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