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중 기술 패권 전쟁 (3부)
트럼프의 관세 전쟁과 패권 경쟁의 서막
제3부: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리다: 트럼프의 관세 전쟁과 패권 경쟁의 서막
오랫동안 수면 아래에서 들끓던 미중 간의 긴장과 중국의 노골적인 기술 야심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등장과 함께 마침내 폭발적인 갈등으로 분출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거칠고 예측 불가능한 스타일은 종종 갈등의 원인으로 지목되지만, 보다 깊이 들여다보면 그의 등장은 원인이라기보다는 기폭제에 가까웠다. 미국의 대중국 정책이 협력에서 대결로 전환된 것은, '중국제조 2025'로 상징되는 중국의 부상이 더 이상 미국이 용인할 수 없는 수준의 위협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며, 이는 이미 워싱턴에서 서서히 형성되던 초당적 공감대였다.
3.1. 오바마의 '피봇 투 아시아'에서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로
중국의 부상에 대한 미국의 우려는 트럼프 행정부 이전부터 존재했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아시아로의 회귀(Pivot to Asia)' 또는 '재균형(Rebalance)' 정책은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견제하기 위해 미국의 외교적, 군사적 자원을 아시아에 집중하려는 시도였다. 이 전략의 경제적 핵심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이었다. TPP는 높은 수준의 무역 규범을 통해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경제 질서를 미국 주도로 재편하고, 여기에 참여하지 않은 중국을 간접적으로 고립시키고 견제하려는 다자주의적 접근이었다.
그러나 트럼프는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TPP에서 탈퇴하고, 다자주의 대신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를 내세운 일방적이고 공격적인 접근을 선택했다. 이는 오바마 행정부의 전략과 방식은 달랐지만, 그 기저에 깔린 중국의 도전을 억제해야 한다는 목표 인식은 연속성을 가진다. '피봇 투 아시아'는 미국 엘리트 그룹이 이미 중국의 도전을 인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트럼프의 방식은 대결로의 '전략적 전환'이라기보다는, 대결의 '전술적 변화'였다. 그는 다자적 포위망이라는 기존의 문법을 파괴하고, 양자 간의 힘겨루기라는 노골적인 방식을 택함으로써 미중 갈등을 새로운 국면으로 이끌었다.
3.2. 무역적자를 넘어 기술 도둑질로: 301조 보고서의 진짜 목표
2018년, 트럼프 행정부는 막대한 대중 무역적자를 명분으로 내세우며 중국산 수입품에 고율의 관세를 부과함으로써 미중 무역 전쟁의 포문을 열었다. 하지만 이 관세 부과의 법적 근거는 1974년 통상법 301조에 따른 미국 무역대표부(USTR)의 조사 보고서였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이 보고서의 핵심 내용은 무역수지의 불균형이 아니었다. 보고서는 중국의 '불공정 무역 관행', 특히 △미국 기업에 대한 기술 이전 강요, △지식재산권 침해, △국가 주도의 사이버 해킹을 통한 첨단 기술 절취 등을 정조준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차이점을 시사한다. 대외적으로는 '일자리'와 '무역적자'를 내세워 정치적 지지를 확보했지만, 무역 전쟁의 전략적 핵심은 처음부터 '기술'이었다. USTR의 301조 보고서는 중국이 '중국제조 2025'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사용해 온 국가 주도의 기술 확보 모델 자체를 문제 삼은 것이다. 즉, 관세는 무기였을 뿐, 진짜 목표는 중국의 기술 굴기를 뒷받침하는 시스템을 와해시키는 것이었다. 이는 미중 갈등이 시작부터 무역 전쟁의 탈을 쓴 '기술 전쟁'이었음을 명백히 증명한다.
3.3. 관세에서 시작해 기술로 번진 전쟁: 화웨이 제재와 디커플링의 본격화
양국의 갈등은 상품에 대한 관세 부과를 넘어 순식간에 중국의 대표 기술 기업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으로 확전되었다. 그 결정타는 2019년 미 상무부가 화웨이를 '거래제한 명단(Entity List)'에 등재한 조치였다. 이로 인해 미국 기업들은 정부의 특별 허가 없이는 화웨이에 어떠한 부품이나 기술도 판매할 수 없게 되었다. 제재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해외직접생산품규칙(FDPR)' 개정을 통해 비미국 기업이라 할지라도 생산 과정에 미국산 기술이나 소프트웨어를 사용했다면 화웨이에 반도체를 공급할 수 없도록 원천 봉쇄했다. 이는 화웨이를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에서 완전히 고립시키려는 시도였다.
화웨이에 대한 제재는 미중 관계가 더 이상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 조치를 통해 미국은 단순히 '공정한' 무역 합의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의 선두 기술 기업을 좌초시켜 5G와 같은 미래 기술에서의 중국의 부상을 저지하겠다는 의도를 명백히 드러냈다. 이 사건은 미중 갈등의 무대를 경제 영역에서 국가안보 영역으로 옮겨놓았으며, 미국과 중국의 기술 생태계를 의도적으로 분리하는 '디커플링(decoupling)'의 시대를 본격적으로 열었다.
트럼프 시대는 미중 관계에 있어 '거대한 촉진제(great accelerator)' 역할을 했다. 그는 수면 아래에 있던 전략적 경쟁을 수면 위로 끌어올려 전면적이고 공공연한 패권 다툼으로 전환시켰다. 오바마 행정부 시기까지만 해도 워싱턴의 정책 엘리트들은 중국의 부상을 우려하면서도, 강력한 재계의 지지를 받는 '관여'라는 기존의 틀을 유지하고 있었다. 트럼프는 '미국 우선주의'라는 이념과 무역적자라는 명분을 내세워 이 틀을 과감히 파괴했다. 그는 301조 보고서를 통해 기술 문제를 전면에 내세우고, 화웨이라는 중국의 국가대표 기업을 직접 타격함으로써 게임의 규칙 자체를 바꾸었다. 이는 더 이상 규칙에 대한 논쟁이 아닌, 원초적인 힘의 대결이었다. 따라서 트럼프는 갈등의 근본 원인은 아니었지만, 잠재되어 있던 갈등을 돌이킬 수 없는 현실로 만든 촉매제였다. 그는 양측이 서로의 패를 모두 드러내게 만들었고, 그의 임기를 넘어 지속될 구조적인 경쟁 구도를 고착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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