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중 기술 패권 전쟁 (2부)
'중국제조 2025'와 기술 자립을 향한 대장정
제2부: 칼을 갈다: '중국제조 2025'와 기술 자립을 향한 대장정
1990년대에 겪은 굴욕적인 경험은 중국에게 뼈아픈 교훈을 남겼다. 기술적, 군사적 열세가 지속되는 한, 국가의 주권과 존엄은 언제든 위협받을 수 있다는 위기감이었다. 이에 중국은 '세계의 공장'이라는 역할에 만족하지 않고, 첨단 기술 분야에서 서방에 대한 의존을 끊고 자립을 이루기 위한 장기적인 전략에 착수했다. 2015년에 발표된 '중국제조 2025'는 이러한 수십 년간의 '와신상담'이 집대성된 결과물이자, 기술 패권을 향한 중국의 야심을 공식적으로 드러낸 출사표였다.
2.1. '세계의 공장'을 넘어: '중국제조 2025'의 청사진
2015년 리커창 당시 총리가 제창한 '중국제조 2025(Made in China 2025, MIC2025)'는 중국의 제조업을 저비용 대량생산 구조에서 기술 중심의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국가급 산업 전략이다. 이 계획의 핵심 목표는 명확하다. 2025년까지 세계 제조강국 대열에 진입하고, 2035년에는 세계 제조강국의 중간 수준에 도달하며, 신중국 건국 100주년이 되는 2049년까지는 세계 제조업을 선도하는 제1강국으로 도약하겠다는 3단계 로드맵을 제시했다.
이는 단순히 산업 구조를 고도화하겠다는 선언을 넘어선다. MIC2025는 핵심 부품과 소재의 국산화율을 대폭 끌어올려, 결정적인 순간에 외국의 기술 공급 중단으로 국가 경제가 마비되는 상황, 즉 1990년대에 겪었던 기술적 무력감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었다. 중국은 이 계획을 통해 막대한 국가 자본과 시장을 동원하여 기술을 확보하고, 궁극적으로는 글로벌 공급망에서 미국과 그 동맹국들을 대체하겠다는 장기적인 비전을 구체화했다.
2.2. 10대 핵심 산업: 패권의 향방을 가를 전장
'중국제조 2025'가 지목한 10대 핵심 산업 분야는 21세기 경제와 안보의 향방을 결정할 전략적 요충지들이다. 이 분야들은 모두 민간과 군사용으로 동시에 활용될 수 있는 이중용도(dual-use) 기술의 성격을 띠고 있어 패권 경쟁의 핵심 전장이 될 수밖에 없다.
10대 핵심 산업은 다음과 같다: 차세대 정보기술(반도체, 통신장비 등), 고급 수치제어 공작기계 및 로봇, 항공우주 장비, 해양 엔지니어링 설비 및 첨단 선박, 선진 궤도교통 설비(고속철 등), 에너지 절약 및 신에너지 자동차, 전력 설비, 농업 기계 설비, 신소재, 바이오의약 및 고성능 의료기기.
예를 들어, 차세대 정보기술 분야의 우위는 5G 통신과 인공지능(AI)의 주도권을 의미하며, 이는 미래의 모든 산업과 군사 작전의 신경망을 장악하는 것과 같다. 항공우주 장비와 로봇 기술은 미래 전장의 양상을 바꿀 핵심 요소이며, 신에너지 자동차와 신소재는 산업 경쟁력과 자원 안보에 직결된다. 중국이 이 10개 분야를 선정한 것은, 과거 서방이 주도했던 산업혁명의 물결을 뒤쫓는 것이 아니라, 다가오는 4차 산업혁명의 파도를 스스로 일으켜 선두에 서겠다는 전략적 계산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2.3. 미국의 제재가 키운 자력갱생: 화웨이와 SMIC의 역설
미국이 중국의 야심을 본격적으로 견제하기 시작하면서, 역설적으로 중국의 기술 자립 노력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화웨이와 중국 최대 파운드리 업체인 SMIC의 생존과 반격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2019년부터 화웨이를 '거래제한 명단(Entity List)'에 올려 미국의 기술과 부품 공급을 차단했으며, 나아가 '해외직접생산품규칙(FDPR)'을 동원해 미국 기술을 사용한 제3국 기업의 반도체조차 화웨이에 판매하지 못하도록 하는 초강력 제재를 가했다. 이는 화웨이의 첨단 스마트폰 사업을 고사시키려는 명백한 의도였다.
대부분의 전문가는 화웨이가 더 이상 첨단 칩을 조달하지 못해 몰락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2023년, 화웨이는 미국의 예상을 뒤엎고 중국 SMIC가 생산한 7나노미터(nm) 공정의 프로세서 '기린 9000s'를 탑재한 스마트폰 '메이트 60 프로'를 출시해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는 첨단 반도체 생산에 필수적인 극자외선(EUV) 노광장비의 대중국 수출이 막힌 상황에서 이룬 성과였다. SMIC는 구형 기술인 심자외선(DUV) 노광장비를 여러 번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방식으로 7나노급 칩을 생산해낸 것으로 분석된다.
물론 이 방식은 생산 효율과 수율이 떨어져 대량 생산에는 한계가 있지만, 이 사건이 갖는 상징적 의미는 막대하다. 이는 미국의 제재가 중국의 기술 발전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으며, 오히려 중국의 '자력갱생(自力更生)' 의지를 더욱 자극하고 기술 국산화를 촉진하는 촉매제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화웨이의 부활은 중국 인민에게는 미국의 압박에 굴하지 않는 국가적 자부심의 상징이 되었고, 중국 지도부에게는 기술 자립 노선이 올바른 길임을 확신시켜주는 계기가 되었다.
'중국제조 2025'는 지난 수십 년간 미국 중심의 세계 질서에 순응하는 듯 보였던 중국이 마침내 자신들의 전략적 의도를 드러낸 '고백'과도 같았다. 1970년대 이후 미국은 중국을 글로벌 경제 체제에 편입시키면 결국 중국이 '책임 있는 이해관계자'가 되어 정치적으로도 자유화될 것이라는 '관여(engagement)' 정책을 유지해왔다. 그러나 MIC2025는 중국의 목표가 단순한 이해관계자가 아니라, 미래 핵심 기술 분야의 '리더'가 되어 기존의 강자들을 대체하는 것임을 명백히 했다.
워싱턴의 정책 결정자들은 이를 더 이상 선의의 산업 발전 계획으로 보지 않았다. 그들은 MIC2025를 국가 주도의 기술 탈취, 강제 기술 이전, 시장 왜곡을 통해 지정학적 우위를 확보하려는 청사진으로 해석했다. 이로써 워싱턴 내에서 수십 년간 이어져 온 '관여' 정책의 컨센서스는 산산조각 났고, 중국을 파트너가 아닌 명백한 '전략적 경쟁자'로 규정하는 새로운 인식이 자리 잡게 되었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이야말로 트럼프와 바이든 행정부의 강경한 대중국 정책을 가능하게 한 근본적인 배경이었다. 무역 전쟁은 단순히 콩이나 철강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중국제조 2025'에 담긴 야심에 대한 미국의 체계적인 반격의 시작이었다.
핵심 산업 분야 | 주요 목표 | 대표 기업 | 패권 경쟁에서의 의미 |
---|---|---|---|
차세대 정보기술 | 반도체 자급률 제고, 5G/6G 통신 기술 선도 | 화웨이, SMIC, ZTE | 4차 산업혁명의 '두뇌'와 '신경망' 장악 시도, 디지털 패권의 핵심 |
고급 수치제어 공작기계 및 로봇 | 스마트 팩토리, 정밀 가공 기술 확보 | 시아순(SIASUN) | 제조업 경쟁력의 근간이자, 군수산업 및 무인 전투체계의 기반 기술 |
항공우주 장비 | 민항기 국산화, 독자 우주정거장 구축 | COMAC, CASC | 군사 정찰, 미사일 기술, 글로벌 위성 네트워크(GPS 대항) 구축 등 군사력 투사의 핵심 |
해양 엔지니어링 및 첨단 선박 | 심해 자원 탐사, 첨단 선박(LNG선 등) 건조 | CSSC | 해양 자원 확보 및 남중국해 등에서의 해양 통제권 강화 |
선진 궤도교통 설비 | 고속철도 기술 수출 및 글로벌 표준 장악 | CRRC | '일대일로' 프로젝트의 물리적 연결망, 유라시아 대륙의 물류 장악 |
에너지 절약 및 신에너지 자동차 | 전기차, 배터리 시장 글로벌 지배력 확보 | BYD, CATL | 미래 자동차 산업 패권 및 글로벌 에너지 전환 과정에서의 주도권 확보 |
전력 설비 | 스마트 그리드, 초고압 송전 기술 선도 | State Grid | 광대한 영토의 효율적 에너지 관리 및 에너지 인프라 수출 |
농업 기계 설비 | 식량 안보 강화 및 농업 생산성 증대 | YTO 그룹 | 14억 인구의 식량 안보 문제 해결 및 농업 기술 자립 |
신소재 | 희토류 가공, 첨단 소재(탄소섬유 등) 국산화 | Baotou Steel | 반도체부터 항공우주까지 모든 첨단 산업의 기초가 되는 소재 공급망 통제 |
바이오의약 및 고성능 의료기기 | 신약 개발, 정밀 의료 기술 확보 | 시노팜, 마인드레이 | 보건 안보 및 미래 바이오 경제 시대의 주도권 확보, 인구 고령화 대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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